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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 일./책 영화/ review

크래쉬(crash), 2004



크래쉬(Crash), 2004, 폴 해기스 감독


처음 몇 분간은 너무 다양한 등장 인물들 덕분에 관계도를 그리면서 보고싶을 정도이다. 하지만 이내 그 많은 등장 인물과 그들간의 관계를 파악하게 된다. 캐릭터가 많은 덕에 그들 한 명 한 명 심층적으로 그리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지만, 일상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혹은 충분히 이해가능한 캐릭터들이기에 어지러운 구도에도 집중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옴니버스 식으로 진행되는 갈등구조는 현실에서도 그러하듯 엮이고 엮여 결국에는 한 청년의 죽음에까지 이르게 되고, 영화에서는 거기서부터 이야기가 시작이 된다. 백인과 흑인의 갈등을 주된 요소로 나타냈지만, 이란인과 아시아인, 남미인(멕시칸) 까지 등장시키면서 보다 미국사회에서 더 복잡해지고 있는 인종간의 갈등문제를 그리려고 한 것이 보인다. 뿐만 아니라, 부부간의 갈등, 기득권과 빈곤층, 상사와의 갈등 까지도 옅게나마 표현하려고 하는 것 같다.

TV 프로그램 감독, 형사, 경관, 보험회사 상담원, 검사, 열쇠 수리공, 가게 주인 등 갖가지 장소에서 제각각의 모습으로 살아가던 그들은 어쩌면 절대 만나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어떠한 우연에 의해 만나 부딪히게 된다. 하지만 갈등이 드러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수면 아래 숨겨져 있어 그 모습을 알지 못했을 뿐 분명히 존재하고 있는 갈등들이 우연적 기회에 의해 드러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영화에서 보여주는 갈등은 우리 사회의 깊은 문제점이다. 언어와 문화라는 극명한 차이부터 시작해서 개인의 자만심과 선입견으로 인한 차이까지 우리 사회는 포스트 모더니즘이라는 이름으로 아주 당연하게 여기고만 있다. 어떻게 보면 그리 다르지도 않는데도 정체성과 개성만을 강조하면서 서로간의 골을 깊게만 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영화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강한 자기'를 포기하는 것을 권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또 다른 갈등을 시사하며 끝이 난다. 단 둘만의 단편적인 갈등이 아닐뿐더러 누가 잘못했는지 꼬집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누구나 다 잘못을 하고 있는 복잡한 갈등의 연속을 보면서 쉽게 풀 수 없는 갈등의 실타래를 내 손에 들고 있는 것처럼 막막하기만 하다.

첫 장면에서 돈 치들이 차 안에서 파트너에게 'LA에서는 터치가 없다, 차 안에 갇혀만 있다, 터치가 그리워 충돌하려고 한다.'고 말한다. 개인주의의 영향으로 개인간의 거리가 멀고, 차로만 이동이 가능한, 미국에 대한 회의감으로만 보기에는 너무 내 마음에 박히는 말이다. 옆 집 사람들을 만나기조차 어려운 현대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 모두의 고민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