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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 일./책 영화/ review

우리들의 어린 영웅 <판의 미로>와 <나는, 인어공주>

                    

판의 미로(El Laberinto del Fauno Pan's Labyrinth), 2006     나는, 인어공주(Rusalka), 2007
길예르모 델 토로 감독                                                                   안나 멜리키안 감독


    어렸을 적에는 산타할아버지라는 존재가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언젠가는 산타할아버지는 어른들이 지어낸 가상인물이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할 때가 온다. 처음에는 자신의 세계 속에 당연히 자리 잡고 있던 것이 사라지는 것에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내전이 아직 끝나지 않아 정규군과 게릴라군의 살벌한 대치 속에서도 동화를 즐겨 읽는, <판의 미로>의 오펠리아와 바다에서 아빠가 돌아올 것만을 기다리다 아빠가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끝내 입을 꼭 다물고 도시로 떠나버린 <나는, 인어공주>의 알리사는 이런 점에서 닮아있다. 두 영화는 현실세계와 가상세계라가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는 것을 소녀의 시각에서 동화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두 소녀의 성장과정에서 가상세계와 현실세계의 접점에서 현실세계를 깨우쳐 주는 존재가 없다. 현실세계에서 그들과 소통할 대상이 결핍되어 있기 때문이다. 오펠리아의 엄마는 남편이 죽자 장군의 아들을 갖고, 오펠리아에게는 동화를 읽지 말라고 타이른다. 자신의 아빠가 바뀌는 것도 받아들이기 어려운데 어렸을 때부터 믿어온 동화 세계가 허구에 불과하다며 다그친다. 한편, 알리사의 눈에도 엄마가 자신의 아빠를 기다리지 못하고, 다른 아빠들을 찾는 것에만 급급할 뿐 자신이 원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어 보인다. 결국 그녀는 입을 다물어 현실과의 소통을 차단해버린다.
     따라서 순진한 소녀가 각박한 현실에서 살아남기 위해 가상이란 도구를 사용한다. 오펠리아의 새로운 아빠는 사람을 죽이고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잔인한 사람이다. 자신의 죽음 앞에서도 시간의 정확함에 집착하는 냉정한 사람이다. 뿐만 아니라, 총성이 언제나 그녀의 귓가에 울린다. 알리사는 ‘갈 곳 없는 사람들이 모이는’ 모스크바로 떠나 다양한 군상 속에서 혹독함을 맛본다. 사랑하는 남자가 생기지만, 속을 알 수 없는 그에게서 배신감을 느낀다. 이렇게 두 소녀의 살이 맞닿아 있는 현실이 차가워질수록 그들은 동화세계를 각각 그들이 태어난 곳으로 설정하고, 동화세계 속에 살아간다. 오펠리아는 공주로 태어난 지하세계로 돌아가기 위해 세 개의 관문을 통과하고, 알리사는 자신이 태어난 바다로 돌아가는 꿈을 계속 꾸면서 소원을 이루는 마법을 부린다.
     자신의 꿈을 떼어내지 못하고 현실을 살아가려 했던 소녀들은 결국 죽음이라는 파국에 치닫게 된다. 오펠리아는 자신의 남동생을 구하려다가, 알리사는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의 목숨을 구한 기쁨에 취해있다가 갑작스레 죽는다. 물론, 소녀들에게 죽음의 의미는 현실세계에서 통용되는 슬픔이 결코 아니다. 그들이 다른 한편으로 살아오던 가상세계에서는 오히려 재탄생의 기쁨이기 때문이다. 오펠리아는 마지막 관문을 통과하고 지하세계로, 알리사는 도시에서 ‘흔한 사건‘을 끝으로 바다로 돌아가 가상세계가 현실이 되어 그들의 삶은 계속된다.
     <판의 미로>와 <나는, 인어공주> 속의 두 소녀, 오펠리아와 알리사의 말도 안 되는 공상이 웃기지만 웃지 못하는 이유는 이들의 모습에서 우리의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어렸을 적 꿨던 꿈을 어른이 되어가면서 우리가 자연스레 포기해가는 과정 속에 순수함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오펠리아와 알리사는 소녀의 꿈을 간직한 채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결코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우리는 미처 살아내지 못한 삶을 살다간 영웅이 아닐까.